아테나의 남동인 헤르메스(Heremes)는 제우스와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Maia)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이아는 아르카디아에 있는 킬레네(Kyllene) 산의 한 동굴에서 헤르메스를 낳았는데, 그가 태어나자 관습대로 아이를 보에 싸서 여러 겹으로 감아놓았다. 그런데 아이가 움직여 대더니 감아놓은 보를 풀고 혼자 테살리아까지 갔다. 그곳에는 형 아폴론이 아드메토스 왕의 소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형이 소홀한 틈을 타서 암소 열두 마리, 암송아지 백 마리, 황소 한 마리를 훔쳐 꼬리에다 나뭇가지를 매달아 소들의 발자국을 지우면서 메세니아의 필로스까지 몰고 갔다. 그곳에 이르자 암송아지 두 마리를 잡아 열두 몫으로 나누어 열두 신들을 위해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소 떼들을 은밀한 곳에 감춘 다음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그때 입구에서 거북 한 마리를 잡아 갖고 들어와 살과 내장을 빼낸 다음 소 내장으로 만든 줄을 속이 빈 거북 껍데기의 양쪽 끝에 걸어 매고 줄을 튕겨보았다. 그러자 멋진 소리가 났다. 리라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소를 잃은 아폴론은 사방으로 소를 찾아 나섰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자신의 예언술로 보니 킬레네 사 쪽이었다. 켈레네로 달려가 마이아를 비난했더니 마이아는 보에 싸인 아이를 가리켰다. 아폴론은 제우스에게 달려가 하소연했다. 제우스는 헤르메스에게 훔친 소들을 되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아폴론은 동굴에서 리라를 보고 욕심이 생겨 헤르메스와 흥정을 했고 결국 소 떼와 맞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리라는 아폴론의 것이 되었다.
헤르메스가 태어나자마자 발휘한 것은 그의 중요한 두 특징인 '술책'과 '이동성'이다. 꾀 많은 술책은 그를 상업의 신으로 만들었고, 발 빠른 이동성은 제우스가 온갖 명령 하달과 심부름을 도맡는 전령의 신이 되게 했으며, 게다가 죽은 자의 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영혼의 동반자'가 되게도 했다.
헤르메스는 얼마 후 '판의 피리'라고 불리는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것 역시 아폴론이 소 떼를 몰 때 사용하던 황금 지팡이와 맞바꿨다. 그 후 어느 날 헤르메스는 뱀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이 지팡이로 두 뱀을 갈라놓았다. 조용해진 두 뱀은 그 지팡이를 타고 기어올랐다. 우리가 가끔 표장에서 보는, 두 마리의 뱀이 휘감고 있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 지팡이는 대사와 군사의 표장으로 사용되었다. 두 마리의 뱀이 휘감고 있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는 꼭대기에 보통 두 개의 조그만 날개가 붙어 있는 것으로, 의사들의 표장과는 약간 다르다. 의사들의 표장은 아스클레피오스의 뱀이 휘감고 있는 지팡이들이 서로 맞대어 걸려 있고 그 위에 신중함의 상징인 거울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의사들에게는 '신중함'을 강조하여 '거울'이 달린 반면, 대사나 군사들에게는 재빠른 '이동성'을 강조하여 '날개'가 달린 것이다. 헤르메스의 지팡이는 누구에게든 갖다 대기만 하면 잠이 들게 하는 마법의 지팡이이기도 하다. 헤라의 명령을 받아 암소로 변한 이오를 감시 중이던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를 처치하라는 제우스의 명을 받은 헤르메스가 아르고스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이 지팡이 덕분이었다.
헤르메스의 빠른 움직임은 제우스의 명령을 신들과 인간들에게 하달하는 데 제격이다. 요정 칼립소(Kalypso)에게 잡혀 있던 오디세우스를 풀어주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전달하고, 오디세우스에게 키르케(Kirke)의 마법 해독제를 전달한 것도 헤르메스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의도를 잘 꿰뚫어 보고 영웅들이 곤경에 처하는 어려운 순간에 나타나 제우스의 도움을 전해 주는 보조 역할을 잘 수행했다. 페르세우스에게 하데스의 투구를 빌려준 것도 헤르메스였고, 프릭소스(Phrixos)와 헬레(Helle)를 구해 주려고 하늘을 나는 황금 양을 보낸 것도 헤르메스였다. 제우스의 발 빠른 심복인 헤르메스는 제우스가 튀폰과 싸울 때 잘린 '힘줄'을 되찾아 제우스가 다시 힘을 쓸 수 있도록 재빨리 조치하기도 했다. 헤르메스의 빠른 이동 능력은 허공을 날게 하는 '날개 달린 신발' 덕분이었다.
헤르메스는 빠른 이동 능력을 발휘해 여행자를 돕고 소 떼나 양 떼를 몰고 이동하는 목동들을 보호한다. 헤르메스는 어깨에 어린 양을 매고 있는 '어진 목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는 죽은 자의 넋을 저승 세계로 인도하는 임무도 수행한다. 사람들은 왕래가 많은 사거리에 그의 모습이 새겨진 기둥을 세워놓기도 했다. 게다가 헤르메스는 꾀 많은 재주꾼인 데다 술수에 능하고 말을 잘해, 상대방을 설득하여 물건들을 맞바꾸거나 남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상인의 신이며, 나아가서는 도둑의 신이기도 하다. 비양심적인 술책에 의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비난받을 점이 많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헤르메스는 나쁜 점보다는 행운과 뜻밖의 발상을 가져다주는 유익하고 자비로운 신이다.
꾀 많은 언변과 발 빠른 움직임은 헤르메스로 하여금 여러 연인들을 사귀게 했는데 유명한 후손으로는 아프로디테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남녀 양성인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os)와, 필로니스(Philonis)와의 관계에서 태어나 지략가인 오디세우스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아우톨리코스(Autolykos)가 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제갈공명으로 지략이 뛰어났던 것은 외가 쪽으로 헤르메스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진성, 『그리스 신화의 이해』,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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