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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그리스 신화 - 데메테르

by 미네R 2022.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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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테르는 매우 오래된 신이라고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기술했다. 제우스의 다른 누이들인 헤스티아, 헤라와 함께 데메테르는 올림포스 신들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숭배된 신이다. 데메테르의 설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아르카디아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가이아의 남편인 포세이돈과 연계된 대지의 여신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오래된 데메테르의 모습은 검은 베일을 쓴 동물들의 여왕으로, 여러 지방에서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데메테르는 점차 곡식의 신으로 자리 잡았다. 곡식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밀의 경작과 수확이 데메테르의 소관이었다. 미케네의 점토판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다마테'로 '대지의 어머니'라는 뜻이지만 가이아와 그 뜻이 크게 다르다. 가이아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인 반면, 데메테르는 밀이 자라는 평원의 어머니이고 땅의 생산력을 주관하는 여신이다. 그러나 식물 모두를 주관하는 것은 아니다. 주로 곡식을 관할하며 특히 밀의 경작을 주관한다. 그렇기 때문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같은 귀족 사회의 싸움 이야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단 한 번 밖에 언급되지 않는다.

밀의 파종과 수확을 꼼꼼하게 지켜보는 것이 데메테르의 일이라면, 곡물 창고를 가득 채워 놓는 '풍요'는 데메테르의 아들 플루토스(Ploutos)의 몫이다. 플루토스는 데메테르가 크레타에서 기름진 땅을 찾았을 때 멋진 인간 이아시온(Iasion)과 세 번 갈아 일군 밭고랑에서 관계를 맺은 후 태어난 아들이라, 땅이 베푸는 풍요로운 밀 수확을 뜻한다. 플루토스는 나중에 일반적인 '풍요'를 가리키는 신으로 변하는데,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의 또 다른 이름인 '플루톤(Plouton)'은 플루토스에서 파생된 것이다. ' 밀의 풍요'를 뜻하는 플루토스가 죽은 사람들로 붐비는 '객의 풍요'를 뜻하는 플루톤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데메테르가 밀을 주관하고, 플루토스가 밀을 풍요를 다스린다면, 밀이 파종되어 새싹이 돋아나 수확이 끝날 때까지는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가 주관한다. 밭에서 남녀가 사랑하는 행위는 사람에게서처럼 대지를 풍요롭게 잉태시킨다는 농경 사회의 소박한 믿음이 반영된 플루토스의 출생 이야기는 아름다운 옛 시절의 풍습을 엿보게 해주지만, 데메테르와 그의 딸 코레(페르세포네)의 이야기에는 슬프기 그지없는 사연이 들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데메테르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이며 제우스의 누이다. 데메테르는 제우스와 사랑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처녀'라는 뜻의 '코레(Kore)'라고 불리는 이 딸은 요정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자랐고 제우스의 다른 딸들과도 잘 어울려 놀았다. 어느 날 그녀는 밀밭에서 꽃을 따고 있었다. 그녀가 수선화 한 송이를 따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갑자기 땅이 열리고 용이 끄는 이륜 전차를 탄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가 나타나 순식간에 코레를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코레를 바라보다 사랑에 빠진 하데스가 제우스와 공모해 그녀를 납치한 것이다. 코레는 지하 세계로 끌려 사라지면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딸의 외침을 듣고 불안해진 데메테르는 곧 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코레는 어디에도 없었다. 데메테르는 밤낮으로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 세상을 헤맸고 밤이면 양손에 횃불을 들고 딸을 찾아다녔다. 열흘째 되던 날 데메테르는 납치 장면을 목격한 여신 헤카테(Hekate)를 만났다. 그녀는 외침을 듣고 납치자를 보긴 했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납치자의 머리가 어두운 그림자로 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메테르는 모든 것을 바라보는 태양 헬리오스(Helios)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헬리오스는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분노한 데메테르는 올림포스의 거처로 올라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딸을 돌려받을 때까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여신은 평범한 노파의 모습을 하고 엘레우시스에 나타났다. 그때 켈레오스(Keleos) 왕의 궁전 앞에는 그곳의 모든 노파들이 모여 있었는데 데메테르를 보고 같이 어울려 식사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딸을 잃은 슬픔에 젖어 있던 데메테르는 응하지 않았다. 그때 이암베(Iambe) 혹은 바우보(Baubo)라는 여인이 농담을 했다던가, 치마를 올려 엉덩이를 보였다던가 해서 데메테르는 웃게 되었고 겨우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 때마침 궁전에서는 왕비 메타네이라(Metaneira)가 아들을 낳아 유모를 구하던 주이었다. 결국 데메테르가 왕비의 아이를 돌보게 되었다. 아들의 이름은 데모폰(Demophon) 혹은 트리프톨레모스(Triptolemos)라고 했다. 데메테르는 이 아이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주려고 매일 밤 아이를 불에 담갔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우연히 그 광경을 보게 된 왕비는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왕비의 소리에 놀란 데메테르는 그만 아이를 놓쳐 아이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이제 데메테르는 신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데메테르는 왕비의 집에 기거하며 아이를 키운 기념으로 트리프톨레모스에게 세계를 돌아다니며 밀을 경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영광스러운 사명을 안겨주었다. 날개 달린 용이 끄는 전차를 타고 트리프톨레모스는 곳곳에 밀의 씨를 뿌리기 위해 출발했다.

데메테르가 손을 놓고 밀 경작을 소홀히 하자 대지는 불모의 땅으로 변해버리고 세계의 질서는 엉망이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제우스는 데메테르에게 딸을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데스에게 가서 코레를 데메테르에게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어버린 후였다. 지하 세계로 끌려간 코레는 납치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단식을 해왔는데, 그만 하데스 궁전의 정원에서 석류알 하나를 먹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석류는 지하 세계에 속하는 열매인 동시에 생식력의 상징이자 처녀의 상징이기도 했고, 결혼의 열매이기도 했다. 하데스의 석류를 먹은 코레는 지하 세계의 하데스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하데스의 왕비가 된 코레는 이제 '가장 무서운 여인'이라는 뜻인 '페르세포네(Persephone)'라고 불리게 되었다. 페르세포네를 지상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타협이 필요했다. 데메테르도 올림포스로 돌아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고, 페르세포네는 어머니와 지하 세계 사이를 적절히 왕래하면서 살아야 했다. 결국 페르세포네는 밀의 씨를 뿌리는 10월 초에는 지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올라와 밀의 주관자인 어머니 옆에서 지내다가, 수확이 끝나는 6월 초엔 다시 어두운 지하 세계로 내려가 남편인 하데스 왕 옆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 후로 그녀가 어머니 데메테르와 떨어져 지하 세계에 사는 동안,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불볕더위가 넉 달 동안 펼쳐지게 된다. 지중해 연안의 기후는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아 풀은 말라 죽고 땅은 메말라 갈라진다. 밀이 자라지 않을 때다. 페르세포네가 밀의 파종기인 가을부터 수확기인 초여름까지 1년의 3분의 2인 8개월 동안 지상 세계에 어머니와 함께 있다가, 수확이 끝난 다음부터 1년의 나머지 4개월 동안 지하 세계에 머문다는 이야기는 밀의 파종과 성장, 수확의 과정을 상징하는 전설이며,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를 숭배하는 의식은 농경 사회의 근본적인 소망일 수밖에 없다. 곡식의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이 그 의식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는 이제 곡식의 신으로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둘이 함께 숭배의 대상이 된다. 고대 그리스의 농촌에서는 엘레우시스의 데메테르 축제를 시작으로 경작 축제, 파종 축제, 햇포도주 축제, 수확 축제 등에서 두 여신을 주인공으로 받들어 모시면서 풍년을 기원하고 수확을 감사했으며, 밀 경작이 특히 잘 되는 그리스 여러 지역에서는 두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짓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렸다. 데메테르 신전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여신이 유모로 일하며 머물렀던 엘레우시스에 있다. 한편 회화에서 데메테르는 지하 세계를 대표하는 동물인 뱀 옆에 횃불을 들고 앉아 있거나 밀 이삭이나 풍요의 상징인 바구니를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수선화와 양귀비도 데메테르를 상징한다.

 

 

이진성, 『그리스 신화의 이해』,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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